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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비평/창작과 비평

TIMF앙상블 C-LAB, 나실인 작곡작품 연주회 리뷰

by Muzik者 2015. 4. 24.

팀프(TIMF) 앙상블의 C-LAB 시리즈 첫번째 연주회였던 '최지연 작곡작품 연주회 리뷰(링크)'에 이어 오늘은 두번째 연주회인 작곡가 나실인님의 작곡작품 연주회를 리뷰합니다. 역시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연주회로 부터 한참(무려 두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후기를 쓰게되었네요. 작곡가님이 제 블로그의 글들을 잘 읽고 있다고 하여 꼭 후기를 올리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이렇게 올립니다. 나실인님 왈(曰)


"아주 신랄하게 써줘!"


ㅎㅎㅎ 신랄까지는 잘 모르겠고 지랄이라면 자신있지만..ㅋ 그냥 솔직하게 쓰겠다고 했죠..ㅎㅎ


나실인 - 소통의 음악, 공감의 드라마

(2015.02.26.목. 오후7:30, 일신홀)


이 연주회는 팀프앙상블의 작곡아카데미의 음악극 강의(강사 : 나실인)와 연동된 렉쳐콘서트(Lecture Concert)인데요 1, 2부로 나뉜 이 연주회에서 1부는 2011~2012년 사이 작곡하여 그간 발표되었던 실내악 작품들로, 2부는 새로 작곡하고 있는 음악극 중 2막이 초연되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작곡가가 곡이 연주되기 전과 무대 세팅 중에 잠깐씩 무대로 나오셔서 짧게 간략한 해설과 함께 감상포인트를 직접 알려주기도 하는 등 '소통'에 노력을 기울이시네요.^^


연주회 포스터! 컴퓨터 백신광고 아님!!


기독교인들은 작곡가의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죠. 그렇습니다. 성경 속에서 나오는 '나실인' 으로 부터 지은 이름 이라는데요... 히브리어로 '성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사람 중에 하느님(하나님)께 일정기간 헌신하기로 서약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는 군요. 이 나실인이 되려면 스스로가 하느님께 서원하거나 사무엘 처럼 아기 때 부모님이 서원(사무엘 상 1장)하는 데요... 때로는 '삼손'과 같이 하느님이 직접 지정한 경우(사사기 13장)도 있다는 군요.


그렇습니다. 작곡가 나실인님은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본인 스스로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작품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 소개할 작품들도 그렇게 모두 기독교적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작곡가 나실인 (출처-나실인 페이스북)ㅋㅋㅋ

나실인은 서울대 음대에서 강석희, 이신우 교수를 사사하였는데, 그의 스승인 이신우 교수 역시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많이 써왔죠. 또 독일에서 만프레드 트로얀 (Manfred Trojan) 교수를 사사하였는데 그의 영향으로 '현대음악' 이라는 사조적 개념이나 단어에 얽매이기 보다 자신의 모든 배움과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음을 프로그램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클래식과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대중음악까지도,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조화롭게 엮어낸 것이 자신의 음악언어라는 군요. 또한 그는 음악극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그동안 실내악 편성으로 공연되는 여러 음악극들을 선보여 왔습니다.


대부분의 음악회에서 작곡가들이 자신의 소개란에 학력자랑과 경력자랑 및 대학 출강정보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번 C-LAB 연주회(최지연, 나실인)는 짧은 글로 나마 작곡가의 '음악관'을 프로그램에 서술함으로써 그들의 음악을 좀더 생각하고 이해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군요. 여느 음악회들 처럼 자신의 '스펙'을 내세우며 기만적인 태도로 음악을 뽐내기 보다, 좀 더 낮고 겸손한 자세로 친절히 관객과 소통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본 공연의 진행과 기획(음악감독 : 최우정)이 참 맘에 들고요 또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하지만 포스터가 안습ㅠㅠ


1부의 프로그램들은 이미 발표한 적이 있는 곡들이라 유투브를 찾아보니 작곡가님의 유투브 채널(링크)에 과거 연주회의 영상이 있네요. 이날 연주회의 영상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지만 곡이 궁금하실 구독자분들을 위해 과거 연주회의 영상을 퍼왔습니다. 오늘 리뷰로 나실인님 음악에 대해 관심이 가시는 분들은 링크한 작곡가님의 채널을 구독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클래식, 뮤지컬에서 부터 크로스오버까지 나실인님의 정말 다양한 작곡 & 편곡 작품들이 있네요.


그럼 작품들을 찾아볼께요. 다른 리뷰들과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에 실린 작곡가의 해설은 황갈색으로 씁니다. 각각 <술람미>, <로뎀나무 아래에서>, <현악3중주>,<사후에>(의역임) 또는 <삶의 저편에서>(의역) 등으로 하면 될걸 영어로 쓰고 있는 점은 참 마음에 들지 않지만, 프로그램의 제목표기에서 외래어 남용에 대해서는  씨랩(C-LAB)리뷰 전편(최지연 작품연주회)에서 질리도록 언급한 바 있으니 오늘의 리뷰에서는 이쯤 해 두겠습니다.


Sluamith (2012)

for Violin and Piano



지혜의 왕으로 알려져 있는 솔로몬은 여자를 좋아했다. 그는 파라오의 딸 뿐만 아니라 모압 여자, 암몬 여자, 에돔 여자, 시돈 여자, 헷 여자도 좋아하여,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을 둔 왕이다. 그런데 이 왕은 그 많은 세계의 미인들 보다 까무잡잡한 한 시골의 여인을 더욱 사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술람미(Sulamith)이다. 솔로몬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녀와의 사랑에 대해서 장편의 시를 썼고, 이 시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성서의 한 장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이들의 사랑이야기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특히 술람미의 입장에서, 그녀가 느낄만한 다양한 감정들이 작품 속에서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나타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알 수 없는 유혹과 이끌림, 자신을 파괴해 버리도록 강렬한 열정과 질투, 사랑하는 이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 순간일지라도 영원히 기억되는 행복과 환희, 진리에 대한 믿음 등의 감정이 이 작품 안에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며 작곡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여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서8장6-7절)


도입부에 음산(?)한 울림으로 시작하여 점차 서정적인 멜로디로 옮겨가는데요... 도입부의 음산한 울림이나 현의 차가움이 곡 중간 중간에 다시 출현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낭만주의 또는 신낭만주의(Neo Romantic) 영향을 받은 듯 해 보이며, 전결구도가 명확하며 시적 표현들이 서사적인 긴장구조로 점철된 곡인 것 같습니다. 술람미의 감정과 사랑노래(아가서)를 모티브 삼아 표현하고 있기에 이야기 또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구성된 곡의 분위기와 긴장 구조가 제법 탄탄합니다.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비교적 어렵지 않은(!) 낭만주의의 전통을 계승한 듯한 어법에 서사적 줄기를 기반하여 곡의 흐름과 표현들이 분명하기에 감상이 편안하며 듣기에도 좋습니다. 다만 술람미의 다양한 감정의 표현들이 작곡가의 의도대로 압축되어 나타났다기 보다는 전결구도에 따라 일련(一連)되어 표현되어 있지는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Under a Juniper Tree (2012)

for Clarinet and Piano



로뎀나무 아래서 혼자 남은 엘리야는 하나님 만을 따랐던 독한 예언자였다. 그는 이방 종교에 빠져있는 왕과 왕비를 대적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에게두려움과 불안감이 찾아 온다.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계속 도망 다니다 죽을 수 밖에 없고, 또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생각은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이제 자기를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너무 지친 나머지 그는 그대로 잠들었다.

나는 로뎀나무 아래서 지쳐 잠든 한 사람을 생각하며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클라리넷의 음색은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외로운 한 사람의 절규처럼 느껴진다. 이 음악은 그의 꿈 속에서 그가 겪었던 사건들이 그의 외롭고 떨리는 심리상태와 함께 환상처럼 뒤섞여 있는 것을 묘사한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꿈에서 깨어난다.

천사가 그를 깨운다. '일어나 먹으라'.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병이 있었다. 그는 이것을 먹고 다시 잠에 든다. 다신 천사가 그를 깨운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그는 다시 일어나 그것을 먹고 40일 밤낮을 걸어 호렙산에서 다시 한번 여호와의 계시를 듣는다.


"술람미"와 마찬가지로 성경 속 인물과 서사를 바탕으로 써진 곡 이에요. 피아노의 강렬한 도입으로 시작되는데 초반부는 마치 누군가를 위로하듯 또는 말을 걸 듯 차분하면서 유려한 멜로디를 이어가네요. 중간중간에 도입에 쓰인 피아노의 음형이 한번 씩 각인 시키 듯 나오는데 3분 쯤 들어서 까지 이러한 부드럽고 따뜻한 멜로디가 주를 이루다 완전히 곡의 분위기를 바꿉니다. 앞 부분이 지쳐 잠든 사람에게 포근히 전해지는 위로와 같다면 그 다음부터 펼쳐지는 다양한 흐름들은 꿈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건과 감정들을 시시각각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고조되었던 긴장감은 다시 초반의 기억을 잠시 더듬고 이내 다시 격렬한 감정을 상기시키는 등 형식적으로 성격이 상반된 두 섹션들을 교차 반복해 배치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다시 그 위로하는 듯하 따뜻한 멜로디로 마무리 하는 것이 매우 단순한 대비로 형식적 균형을 만들어 가고 긴장의 흐름에서도 이완-격정-이완-고조-이완의 교차 흐름으로 과도한 긴장을 유발하거나 반대로 지루한 흐름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감상하기에 매우 편안한 곡이고 듣고 있으면서 왠지 모르게 위로받는 듯한 느낌을 받네요. 이거슨 힐링뮤직?! 작곡가 스스로도 이곡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자기위로(자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String Trio (2011)



<스트링 트리오>는 낭만성을 그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에 걸맞게 작품은 더 없이 낭만적인 울림을 들려준다. 하지만 거기에는 말러의 후기작품에서 느껴지는 세기말적인 비관이 들어 있지는 않다. 그가 생각하는 낭만성은 '닿을 수 없는 동경(Sehnsucht)'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에 무한히 다가가는 일이 아니다. 무한히 다가가는 활동 그 자체가 진보요, 발전이요, 삶에 에너지를 가져다 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무한히 다가가지만 결코 다다를 수 없기에 낭만적 동경은 마음을 상하게 하였고 -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잠언13장12절)-, 그 속에는 깊은 슬품과 체념이 깃들게 되었다. 결코 이를 수 없는 아름다움, 혹은 내 전 조재와 맞바꾸어야만 하는 그런 값비싼 아름다움이라면, 그것을 감히 지불할 수 있는 영웅들의 시대는 이제 가버리지 않았는가.

작 곡가는 상실감에 대한 위로에 더 집중한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진술하게 느끼게 해 주는데 음악, 혹은 낭만성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본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일깨워 주는 마음의 울림이요, 한 호흡의 기도이며, 먼저 손 내밀어 주는 한 번의 위로다.


"낭만"(감정적이고 이성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또는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네요. 그런데 나실인의 '낭만성'이 기존의 낭만주의나 철학이나 현대예술의 신낭만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낭만'이라는 세계관은 인본주의적 이성이나 감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종교적 특히 복음주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예술'이나 '아름다움'이란 기독교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낭만에 대한 물음에서 '소망'을 찾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하느님(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곡은 극적인 변화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기 보다는 대체적으로 하나의 큰 줄기를 이루며 애절한 멜로디로 인간 본연의 슬픔이나 아픔들을 다양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죠. 아쉬운점은 내면의 다양한 아픔이나 심연을 다루는 것 치고는 그 구체화된 소리들이 낭만주의 전통에 견고히 기반하고 있다 보니 표현 방식이 제한적이지는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그의 '종교적 낭만성'이 기존의 '인본적 낭만성'과 차별성을 실감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극 Beyond Life 中 (2014 / 초연)

2막 하늘과 강물이 만나는 곳 (이지현 극본)


가려고 길을 나섰는데도 못 가본 그 아름다운 길, 가지려고 하지만 가질 수 없는 그 신비로운 것, 가진 줄도 모르고 놓쳐버린 그 귀한 것, 사랑하지만 사랑할 줄 몰랐던 사람에게 상처받았던 시간들, 사랑할 줄 몰라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줬던 시간들, 그 형체 없는 아련한 생각들... 정신이 퍼특들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나 기억은 다사치일 뿐이라고, 내가 얼마나 배부른 사람인가 하며 반성하지만 내 생각이 가는 곳 한 군데도 내 맘대로 정할 수 없음을 느낄 때가 있다.

나를 도와줄 누구가가 필요하다. 전화라도 한통 걸어 신선한 음성을 듣고 싶지만... 이런 나의 여약함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 어딘가 숨어버리고 싶다. 숨어서 밖으로 절대 나가기 싫다. 언제가 나가게 될 거란 생각이 드는 것조차 번거롭다. 이런 나의 초라함을 바라본다. 나를 도와줄 강한 자를 찾아 나선다.

실 내오케스트라와 한 명의 소프라노를 위한 음악극 Beyond life는 혼수상태에 빠진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오늘 굥연될 '장면2 하늘과 강물이 만나는 곳'에서는 여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나와, 작은 여정을 하는 동안의 이야기다. 영적세계에 들어가 천사들을 만나 마주하고, 살려달라고 부르짖지만 악기 선율로만 표현된 천사들의 대답은 모호하기만 하다. 첫번째 천사들의 대답은 모호하기만 하다. 첫 번째 천사를 만났을 때 여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다가, 두 번째 천사를 만나고는 자신을 찾고 추스르는 모습니다. 세 번째 천사를 만났을 때 여자는 다시 삶을 얻기 위한 어둠속의 전투를 벌인다.


아쉽게도 초연인 이곡은 영상이 없어 링크하지 못했습니다. 나실인 작곡가의 아내인 성악가(소프라노) 이지현님이 극본을 쓴 음악극인데요... 작품 전체는 아직 미완성으로 이날 연주회에서는 지금까지 완성한 2막만을 리딩공연 형태로 초연하였습니다. 극본을 담당한 이지현님이 홀몸도 아닌 무거운 몸(?)으로 직접 노래와 연기를 펼치며 초연을 하였는데요...(연주료 아낄려고 임신한 아내를 부려먹는 나실인!!ㅋ 형수님 힘내세요!!ㅋ) 실 무대연출이 없는 리딩공연이라고는 하지만 음악극에서 성악가 또는 연기자의 연기가 몰입에 있어 매우 중요한데요... 아쉽게도 이지현님의 연기는 대체적으로 어색한 것이 거의 대본읽기 같아서 (그래서 리딩 공연?!) 극의 흐름에 진지하게 몰입하기가 좀 어려웠고 종종 어색함에 그만 손발이 오그라 들더라고요 ...



아무튼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가 영혼이 분리되어 영적세계에서 천사 셋을 차례로 마주하게 되는 내용인데요. 여자(소프라노)는 사람의 언어 즉 말로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는 것에 반해 천사는 각자의 악기(각각 플룻, 클라리넷, 바이올린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나 오래되서 확실치 않음! 작곡가에게 확인한 후 추후 수정할께요!!)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데요... 즉 악기를 언어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첫 천사와는 당연히 외국어를 대하 듯 주인공이 천사의 말(악기연주)를 알아 듣지 못하여 절망하고 답답해 하는 스토리로 전개 되다가 세번째 천사에 이르러서는 천사가 무엇이라 하든 주인공은 대화를 이어가며 스스로에 결단에 이릅니다.


후의 작곡가와의 대화 시간에 나실인님이 부연설명하기를 이 천사와의 대화에서 각 악기(천사)가 연주하는 난해한 선율들은 아무 의미없는 울림이 아니라 실제로는 대본에 분명한 대사들이 있으며 이것을 낭독한 것을 컴퓨터로 음향적 스펙트럼을 분석해 악보에 기입하고 그것을 악기로 연주한 것이라고 하네요.



참으로 기발한 발상인데요... 그렇지만 극중에 주인공이 첫 천사와의 이야기에서 답답해 하는 것 처럼 청자들도 천사의 연주가 어떤 대사를 치고 있는지 전혀 모르니 궁금하면서도 답답하여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자연스레 되더라구요... 그러나, 어설픈 연기가 안습!!ㅠㅠ 결국에 주인공이 스스로 결단하기 까지 천사가 뭔말을 한 것인지는 끝까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영적 또는 사후세계(저승)를 소재로 하고 있는 신비적 판타지를 다루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앞선 작품들과 같이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다루고 있는지는 작품 전체가 소개 된것이 아니라서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혼수상태에서의 사후세계 체험과 같은 영성체험에 대한 간증(?!)은 여러 기독교 종파에서 심심찮게 회자되기도 하지요.


한편, 무직자(Muzik者)가 느끼기에 음악극의 전반적인 스타일이나 음악적 어법들로 볼 때 꼭 클래식 성악가가 아니라도 뮤지컬 배우나 일반 연극 배우(단, 노래가 좀 되는 배우)가 주인공을 맡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질문시간에 관련한 질문을 해 보았지요. 나실인님의 답변도 꼭 전문 성악인이 아니어도 노래와 연기가 된다면 열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전문 뮤지컬 배우가 공연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습니다.


또, 이 곡에 대해 작곡가 본인이 해설을 하면서 아직 연출부분에 대해 고민이 끝나지 않았음을 밝혔는데요, 모노 드라마 음악극으로 연출을 할지 아니면 오라토리오 처럼 배역은 있지만 콘서트 형태로 연출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리딩공연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천사들이 각각의 배역으로 분리되어 악기연주로 대사를 하고 있기에 드라마적 연출을 한다면 이날 공연에서 처럼 천사들이 실내 오케스트라에 속해 있다 자신의 역할 부분에서 일어서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분리되어 나와서 주인공과 대면하며 연주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들이 배역으로 분리되어 악기를 연주하더라도 반주를 하는 실내 오케스트라와 음악적으로 앙상블을 이루며 소리를 생성하고 있기에 천사들이 드라마적 배역을 위해 무대에서 앙상블과 분리 된다면 지휘의 문제와 앙상블과의 소리 조합에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 당연히 천사 역을 맡은 연주자는 자기 배역 부분을 암보하여 연주해야 할 테고요...

아무튼 아직 미완의 작품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 속에서 부분의 결과물을 감상하게 된 건데요. 앞으로 어떠한 연출방향으로 결정이 되든간에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총평


나실인은 분명하게 전통적인 음악어법들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후기낭만이나 신낭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는데요, 대화시간에 팀프앙상블의 음악감독인 최우정이 "관습적인 음악어법을 즐겨 쓰는 이유가 있는가?"라고 물었고 답변으로 '소통'과 '공감'을 가장 크게 고민하다 보니 그러하다 답변 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 자신은 동시대를 사는 작곡가로서 현대 음악이라는 개념에 갇혀 있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자신 스스로는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현대적인 기법들도 많이 고민하며 그것들을 활용하기 위해 나름 많이 애를 쓴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의 결과물에서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지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자신은 애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이라 하네요.


저는 질문을 통해서 이 '소통'과 '공감'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했는데요... 먼저 음악어법이나 언어는 자체가 소통의 수단이며 방법이기는 하나 목적은 아닙니다. 소통은 완전히 비 관습적인 어법으로 작곡을 하여도 작곡자가 이날 그러하였던 것 처럼, 작품해설을 공들여 하거나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관을 밝히는 것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즉 소통은 작곡가가 얼마나 자주 관객과 만나고 생각을 나누는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음악 어법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감'에 대해서는 음악적 언어가 미치는 영향이 분명합니다. '공감대'가 형성이 되려면 상호간에 공통의 분모가 있어야 하는데, 각자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거나 어떠한 사회적 배경지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어떠한 테마나 경향등에 대해 공감대가 자연스레 형성이 됩니다. 따라서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나실인의 낭만주의적 성격의 작품들은 '공감대' 형성에 매우 큰 강점을 갖을 수 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단, 그가 사용하는 어법과는 별개로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비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올지는 미지수 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공감'을 위해 관습적 어법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일정부분 이해는 하지만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는데요... 공감에 있어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 매우 큰 강점이기는 하지만 다른 언어 사용자간에도 충분히 공감대는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비 관습적 어법의 음악이라 할 지라도 '공감'은 충분히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과 일본인 또는 중국인 사이에는 사용하는 언어는 달라도 문화적 공감대는 충분히 형성할 수 있지요. 반면에 사용하는 언어가 같아도 극우나치들과 빨갱이들 사이에는 사상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합니다. 또한 어떠한 특정한 상황 설정들은 언어적 소통구조가 아니더라도 만인의 공감을 이끌기도 합니다. 즉, 공감 형성의 핵심 도구가 반드시 음악어법일 수는 없다는 것이 제 견해 입니다. 단지 수 많은 방법 중에 하나 일 뿐 이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나실인 작곡가가 왠지 현대음악에 대해 약간의 콤플렉스(complex)를 갖고 있다라는 느낌을 좀 받았는데요.. 상당이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예전에 대화를 나누다가 현대음악적 아이디어의 부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이 스스로의 음악에 좀 더 솔직하고 떳떳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자신이 내면에서 내재화 되어 풍기는 자연스런 음악적 아우라가 낭만주의와 맞다아 있다면 그것을 '소통'이나 '공감'과 같은 다른 수사들을 통해 변론할 필요 없이 자신의 솔직한 자아를 그대로를 인정하고 들려주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요 공감이라 생각합니다. 현대음악의 경향이 어떠하든 간에 자신의 작가로서의 취향이나 내면의 울림이 그것과 작동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것들에 대해 컴플렉스를 갖고 언급하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걸러지고 자연스레 내재화되어 표출되고 있는 그 아름다운 선율들에 대해 더 애착을 갖고 당당해졌으면 싶어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작곡가가 자신이 가진 재능과 장점들 보다 자신이 갖지 못한 다른 것들을 신경쓰고 있는 건 아닌지 싶어 이렇게 충심으로 진지하게 서술해 봅니다. 나실인님의 작품이 갖고 있는 높은 완성도와 아름다운 선율들은 비록 관습적 어법이나 표현들이 많이 녹아 있다 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 누구나가 한국어를 쓰지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잖아요?!


반면에 매우 자극적인 언동과 톡특한 프레임의 설정을 통해 간결한 언어도단으로 어려운 전문용어들을 사용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나쁘게 이용하는 장사치나 정치인 및 언론인들도 있지요. 그렇다고 비(非) 관습적인 음악들이 전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맙시다.


이상으로 앙상블 팀프(TIMF)의 C-LAB, 나실인 작곡작품 연주회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덧글

제 리뷰속 비평들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 및 공연에 대한 제 개인적 견해에 불과하며 제 취향과 관점에 근거한 사견일 뿐 이라 작곡가의 의도를 잘못 이해 할 수도 있고 오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와 다른 생각에 대해 언제나 오픈되어 있으니 댓글을 통해 다른 의견 주셔도 고맙겠습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요 기왕 다 읽으신거 아래 공감 버튼도 부탁드릴께요 ^^


- 무직자(Muzik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