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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에세이

미학에 대해

by Muzik者 2016. 8. 21.

(미학에 대한 소견입니다. 오늘은 조금 진지해져서 제 블로그 특유의 친근한 경어체+위키니트문체가 아닌 딱딱한 구어체로 쓰게 되네요. 양해해 주세요.)


아름다움 또는 알음다움


아름다움 즉 미()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미학(美學, Aesthetics)을 공부하다 보면 예술가/작가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 중에 하나가 바로 아름다움과 알음다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공부하는 수많은 서구 근대 미학이론들이 논리학(論理學, logic)을 기반으로 철학에 귀속(?)(또는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철학의 고급스런 개념의 정립 하 에서만 그것이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으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근대 미학적 사고방식이 매우 개념 중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술에서 논의 되는 시각/청각적 경험과 현상은 먼저 감각적 수용과 이성의 인지(認知, cognition) 적 판단의 과정을 거쳐 비로서 감성적 인식(認識, connaissance)이 되는데 이는 연속적이고 복합적인 작용이다. 이를 굳이 형이상학적 고급용어로 개념화/명제화하고 그렇게 정의된 몇가지 단어 따위들로만 단순히 이해하고 설명하려 든다면 그것은 단지 철학을 가장한 지적 허영일 뿐 자칫 예술의 본질은 호도될 수도 있다. 아름다움의 대한 인식과 경험은 대체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함을 갖고 있으며 앎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글도 그 (지적 허영에 가득 찬) 매우 개념적인 고급용어들을 들어다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가당착(自家撞着)! (또 고급용어 시전!ㅋㅋㅋ)

 

사고방식의 차이


근현대 미학이 이런 개념화의 함정에 더 더욱 깊이 빠진 이유는 서구 문화의 개념 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반면에 동양은 전통적으로 관계 중심적 사고가 발달해 있다. 그래서 전통적 동양의 미학들은 미()에 대한 사고의 흐름을 몇가지 개념으로 정의하고 범주화(카테고리화, 분류)하는 것이 서구에 비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예술 뿐 아니라 우주를 바라보는 데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전통적으로 서양은 우주가 암흑물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으며 동양은 우주를 음양의 조화나 기()의 흐름 또는 소우주/대우주 같은 복잡한 관계들의 연결과 상호작용의 총체로 이해했다. 개념(물질) 중심적 사고와 관계 중심적 사고의 차이다.

 

동양의 전통적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느낌" "감정/감성"의 영역이고 좀더 넓게 이야기해 "사람의 마음" 에서 시작한다 말한다. 반면 서구 이성적 철학관을 거치며 모더니즘 이후 지금의 많은 현대의 미학자/철학자들은 <아름다움>"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둘의 사고방식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EBS 다큐 프라임 '동과 서' 갈무리. 우주가 텅비어 있거나 암흑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서양인들과 우주공간에 기가 가득차있고 그 기가 모여 사물이 존재하기에 기와 사물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 믿었던 동양인들)

 

객체화하는 주체적 해석과 관계에 순응하는 깨달음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한 감정이나 이성적 "발견"도 결국 사물(대상/타자) 또는 소리에 대한 감응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시작은 비슷하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대상에 대한 작가/관찰자의 <주체성>에 있다. "발견"은 더 적극적인 주체성을 갖는다. 근대이후 서양에서는 기존의 봉건적 전통적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작가가 능동적 해석과 새로운 시각 및 이론을 제시하는 일이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화제요 담론이었다.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이런 당대의 흐름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사고도 역시나 결국엔 새로운 개념화, 명제화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시각과 해석은 바꾸어 개념의 정의가 바뀌거나 재해석되어 새로운 이론이 성립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고체계 자체의 전환은 이루어지지(시도되지) 못했다.

 

반면에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예술론은 작가 또는 개인의 주체성의 실현보다 우주의 질서, 주변, 자연, 환경(사회) 등과 감응하고 순응하며 조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깨달음의 경지를 예술과 철학의 극치로 여겼다. 깨달음이란 앎,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앎과 지식은 오랜 시간 공부와 경험을 통해 주체적으로 쌓을 수 있지만, 깨달음은 일순간에도 갑자기 깨우칠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오랫동안 지식과 경험을 쌓아도 오히려 깨우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깨달음은 이쪽(, 또는 수행자)의 주체적 의사하고는 관계없이 오히려 저쪽(사물, 타자, 주변, 환경, 사회)에서 전해져와 감응(感應)하는 것이다. 지식이나 앎은 이쪽이(행위자가) 주체적으로 저쪽을 포착하고 판단하여 체계화하고 개념화(언어화)하는 일인 반면 깨달음은 이쪽과 저쪽이 다양한 관계를 맺고 순응하면서 이루어지는 직관의 작용이다.[각주:1] 따라서 동양의 미학에서 미()와 예술은 앎에 그치지 않고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도()가 열린 것이라 여겼다.

 

그러다 보니 음악에서 서양의 음()의 개념은 마치 명사와 같이 객체화 되어있고 화음들 또한 기능적 작용에 의해 정의되고 분류되어 화성이론 같이 체계화되는 반면에 동양에서 음()은 마치 동사와 같이 장단, (調) 등과 유동적인 관계를 맺고 점보다 장 또는 면과 선과 같은 다양한 속성을 모두 아우르는 넓은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장단도역시 서양의 리듬, 템포와 음형 같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선율, 맥, 호흡과 유동적 관계에 순응해야만 직관적으로 습득되고 활용될수 있다.


이렇게 예술에서 작가 개인의 주체적 해석과 개성의 발현을 목적으로 두기보다 깨달음의 도(道)를 추구하다 보니 동양의 음악은 중부유럽처럼 작곡가의 개인에 의한 창작과 생산보다는 집단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공동의 직관이 아우러져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EBS 다큐 프라임 '동과 서' 화면 갈무리)


오늘날의 과제


20세기 중후반 이후 서구 예술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동양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면서 부터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전히 서구 중심적 사고와 주체성을 갖고 동양의 미학과 정신을 객체화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니 많은 경우가 오리엔탈리즘으로 귀결 될 뿐이다. 더 아쉬운 현상은 오늘날 동양인들 스스로가 오리엔탈리즘에 동화되어 자국의 문화와 철학, 미학을 서구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동양인들은 점점 사고체계 자체가 서구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교적 산업화가 더 진행되고 서구 선진국과 더 우호적인 아시아국가일 수록 더 짙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한국 이라든지 대한민국이라든지 아니면 헬조선 같은(...)

 

그렇다고 서구담론을 배척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교류"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미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서양 미학이론들과 사조(思潮)를 열심히 공부하고 그 시대적 담론을 우리 안에서 소개하고 주석하는 일은 매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더불어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서구 미학담론과 철학의 수용과정에서 그것들의 카피(copy)에 그칠게 아니라 그것들과 지금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이는 예술가들도 자신의 작품 중에 스스로 고민해 볼 문제이다. 또 비평가들이 우리의 예술가와 예술작품들을 평가할 때에도 과거 (또는 지금도 여전히) 처럼 서구 미학담론과 이론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학자들 또한 우리 역사와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예술가 및 예술작품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고민해 보아야 한다. 외국의 미학이론을 번역하고 소개해 해석하는 일 정도로 학자의 본분을 다했다고 여긴다면 엄청난 착각이며 그 정도에 안주하는 자들은 학자로서 자격도 없다!


(구글이미지검색에서 검색어 "현대미학" 검색결과. 응?! 잠깐만!)


2016.08.21.

- 무직자(Muzik者) -


 

  1. 이 문단은 내용적으로 이우환의 "여백의 예술" 중 '깨우친다는 것과 안다는 것' (p.252)에 나오는 문단을 부분 인용하는 것이며 해당 문장을 본 칼럼의 문맥에 맞게 조금 수정하고 첨언 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