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에세이

예술에서의 탈(脫) 권위.

by Muzik者 2021. 1. 3.

[1]

단언컨데 예술에서 사전적 의미의 '탈 권위'는 없다. 단지 '모토(motto)'일 뿐이다. 탈 권위를 주장하는 이들이 기존의 길과 다른 길을 모색한 것은 맞겠지만, 기존 권위를 무너뜨린 것도 아니며 자신의 추종자를 배척한 것도 아니다. 단지 한 쪽 귀퉁이에서, 또는 여러 권위들 틈바구니에서 '탈 권위'를 '모토'로 하여 새 권위를 쌓았을 뿐이다.

 

그렇게 부상한 신(新)권위가 쌓여져간 길을 돌아보면, 그 과정은 그들이 싸우던 구(舊) 권위가 쌓아지던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세기에 일어난 수 많은 신 예술운동에서 '탈 권위'와 '탈 전통'이 일종의 도그마(Dogma)로 작동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권위로 부터의 억압을 거부한다던 서구의 68혁명 세대가 이후 보여준 권위주의적인 행태 또한 기억해보자. 그러므로 '탈권위'란 후발주자가 새 시대의 경쟁(힘겨루기)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잡기위한 모토일 뿐이며, 신흥세력으로서 기존 귄위와 권력을 두고 다투는 방법론 중 하나일 뿐이다.

 

[2]

그러나 그렇게 신 조류(潮流)가 부흥하며 새 권위와 신흥세력(권력)이 매 세대마다 등장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렇게 시대는 주역(主役)이 바뀌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 세대의 신 조류의 부흥을 위한 '탈권위 전략'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권장할 만하다. 단지 '탈 권위'를 내세울 때에 "나는 권위가 없으며 권위를 쌓지도 않는다." 고 착각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나 또한 기존 구습을 벗고 싶고 새 길을 가고 싶다. 그 과정에서 나와 내 작품에 새 권력과 새 권위가 생기면 생기는데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3]

반면에 어느 나라 정치권 처럼 구습 세력이 신흥 세력을 두고 "살아있는 권력과 싸운다." 말하는 것은 매우 기만적이다. 신흥세력이 권력을 얻으니 민중을 배반했다는 다른 소수세력의 말 잔치도 기만적이긴 마찬가지다. 배반을 이야기 하는 이유도 소수인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조급함에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국 예술계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정치권과 다르게 원로와 중진들이 후 세대와 신흥작가들을 보고 '살아있는 권력' 운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의 비판과 비평에 대해 가끔 불편한 반응을 보이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염치는 있다. 또 한국 예술계에서 권력과 권위는 '아카데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아카데미 바깥의 다른 길 (즉, 탈 권위의 길)을 가는 작가에 대해 견제할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애초에 권위를 말하기에는 한국 예술계는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무관심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한국 예술에서 권위란 아무도 관심 없는 그저 '그들만의 권위'일 뿐이며 탈 권위도 '그들만의 탈 권위' 일 뿐이다.

 

[4]

또한 예술에서 '탈 권위'를 논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도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서도 모토와 다르게 권위를 과하게 좇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학력을 추구하며 세계적으로 권위있고 유명한 예술가의 제자가 되기를 선망하고 그 줄에 들기를 희망한다. 그 권위자들이 만들어 놓은 체체에 순응하며 그 체제 안에서 행해지는 각종 공모전 및 콩쿨수상 경력과 공연, 전시 경력쌓기에 온 청춘을 바친다.

 

예술을 감상하고 향유해야 할 사람들의 관심보다 그 예술을 하는 기존 권위자들의 '심사'가 더 중요하며, 조촐하더라도 스스로 잔치를 열기보다 그 권위자들이 펼쳐 놓은 잔치에 초대받거나 참여하는 것을 더 큰 영광으로 여긴다. 공식 프로필에는 그 권위를 좇은 발자취를 자랑스레 펼쳐 놓는다.

 

[5]

그러나 권위와 권력 그 자체가 악이 아니다. 권위와 권력에 순응하는 것 또한 나쁘다 할 수 없으며, 반대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이가 더 선하다 볼 수 도 없다. 나는 그저 '탈 권위' 라는 말이 갖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 함이며 이는 다른 권위를 위한 모토 즉, 하나의 수단에 불과함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킨다. 권위와 권력, '탈 권위'란 말은 개념의 속성보다 맥락이 더 중요하다. 예술이든 무엇이든 세상사, 사람의 일은 한 가지 이론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복잡다단한 존재이며 이념이 태동하고 사건이 벌어지기 까지 다양한 이유와 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누가 '탈 권위'를 주창한다면, 우리는 먼저 기존 권위의 역사와 맥락을 잘 살피어야 한다. 전통적인 체제를 지켜려는 보수(保守)의 다양한 프레임에도 속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권위'와 '탈 권위'간의 관계와 역사적 맥락을 냉정히 보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도그마'에 사로 잡히지 않으며 상호간 혐오에도 선동 당하지 않는다.

 

패닉 -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6]

새 세상을 꿈꾸며 양심에 따라 과거 역사에 분노할 수는 있다. 그것을 '탈 권위'의 명분으로 삼는 것도 좋다. 허나 그 분노로 인해 막연한 혐오와 아집(我執)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사색하고 성찰하는 자기 수양도 필요하다. 예술가는 고독하게 자신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어 에고(ego)가 강화되는 일이 많기에 더욱 그렇다. 표정을 감추고 가면을 써도 예술작품에는 자기 내면의 어떤 감추고 싶은 심상이 은연중에 표출될 수 있다. 그래서 혐오에 기반한 파괴적인 심상은 '탈 권위' 아니한 만 못한 결과를 낳는다.

 

[7]

이 글은 예술에서의 권위에 대한 이야기지만 간혹 정치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술 권위도 정치적인 속성과 맥락이 존재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권위란 관계와 사회가 구성 됨으로 생긴다. 그러므로 예술가에게도 사회성은 필요하다.

 

2021년 새해를 맞은 생각의 주저리주저리
- Muzik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