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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비평/창작과 비평

임재경 작곡발표회 "間" 리뷰

by Muzik者 2019. 8. 9.

임재경 작곡 발표회 “間”

자연스러운 내면의 시상과 인위적인 구조 사이의 고민

 

 

지난 6월 18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있었던 임재경의 작곡 리사이틀을 관람 후 느낀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위의 부제와 같습니다. 작곡자가 이야기하는 ‘사이(間)’ 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서...

 

연주 순대로 <취생>, <만공(滿空)>, <Rekonziliation>, <We are...>, <Kubus I>, <...간(間)> 등 총 6작품이 연주되었는데 각각은 제목이 쓰인 방식과 구상(concept)에서 차이가 있었지요. 그래서 프로그램 전체를 마지막 작품의 제목으로 한데 묶어 연주회의 주제로 삼은 것은 자주 통용되는 기획방식이지만, 각각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방향을 잘못 설정하게 할 소지도 있다고 더러 느꼈답니다.

 

 

연주회의 자세한 정보와 작곡가의 작품 해설은 여기 링크에서 보실 수 있으니 먼저 읽어보실 것을 권해요. (링크에 들어가셔서 [프로그램 상세] 메뉴를 클릭하시면 작곡가 해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먼저 <Rekonziliation>의 경우는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무(無) - 등장 – 세 천사 – 해결 – 하늘의 소리 – 평화 – 타락 – 화합“ 같은 서사적인 흐름이 있어요. 전통적인 표제음악(Program Music) 경향이죠. 독일어 제목(영어로는 reconciliation)을 한역 없이 쓴 이유는 아마도 원제가 갖는 두 가지 의미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요. 라틴 어간 re+con(다시+함께)에서 보듯이 어원적 측면에서는 화합, 화해, 중재의 의미도 있지만 문화적 특히 종교적으로는 참회 후 (기독교)신앙으로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거든요. 이 두 가지를 모두 담을 수 있는 번역어로서 마땅한 우리말은 없는 것 같아요. 이 곡은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에 대한 오마주(Homage) 이기도 하지만 작곡가의 신앙고백적인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취생>은 특정 그림 속 이미지를 주제로 삼고 있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색하여 얻은 개인적인 심상(心象)을 추상화 하고 있는 것으로 동일한 발음을 연결고리로 취생 (吹笙. 생황을 불다)을 통해 취생 (取生. 취해있는 삶)의 심정을 담담히 푼 것입니다.  <만공>은 ‘비어있음으로 가득히 차다’는 철학적인 개념을 소리전개의 맥락을 통해 이미지의 연상을 유도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즉, <취생>은 이미지를 통해 사색을 전개하고 <만공>은 철학적 사색을 이미지로 투영하죠.

 

<만공>은 마치 종이 울리듯 시작한 피아노 독주의 맥락이 분명하고 울림에 대한 여운도 충분히 담고 있어 감상의 재미가 있습니다. 다소 전통적인 형식과 어법들로 쓰여진 곡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날 연주된 곡 중 가장 감명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반면에 <취생>은 생황과 더불어 쓰인 타악기에 전통적으로 종교적(불교) 명상에서 쓰인 악기들이 여럿 있었고 그 용례 또한 크게 다르지 않기에 연상작용으로 인해 명상적으로 들리는 요소들이 많아서 내적인 음악을 선호함에도 짙은 아쉬움이 있었어요.

 

특정 대상으로 부터 작곡법을 추출하는 경향에 대해...

 

<Kubus I> 은 방향성이 완전히 다른 작품인데요... 작곡가는 루믹스-큐브 주사위를 뜻하는 독일말 제목 "Kubus"로 지금껏 총 4편의 연작을 작곡했습니다. 이날 연주한 것은 그 중 첫 번째 작품으로 국내 초연이었죠. 이 곡은 작곡방식과 구상부터 다른 곡들과 차별점이 있어요. 다른 곡들이 어떠한 주제나 대상 또는 심상을 작곡가의 음악으로 표현하거나 추상하고 있다면, 이곡은 반대로 어떤 대상을 통해 새로운 작곡법을 구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즉, 큐브 주사위의 구조와 작동원리를 매개로 음정관계와 화음진행을 ‘설정’하고 음가와 리듬 배열을 구축하는 식으로 작곡법을 추출하는 거죠.

 

그점에서 표제를 쓰고 있지만 전통적인 표제담론과는 별개의 음악이라 할 수 있죠.  20/21세기 작곡된 이른 바 현대음악의 많은 작품들이 특정한 대상이나 주제를 제목에 쓰고 있음에도 표제음악담론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애석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젊은 작곡가가 아닌 기성 작곡가이상에게서는 이러한 작곡방식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답니다. 이유는 이러한 작곡방식은 작곡가가 아직 자신의 음악어법을 확립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젊은 작곡가는 예술가로서 초기에 자신의 음악을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작곡법과 표현법을 실험해보고 다양한 콘셉트로 설정해 다루어 보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를 위해 <Kubus>와 같이 자신이 관심을 두거나 포착한 어떤 특정 대상을 정하고 그 대상에서 관찰되는 특징을 통해 음조직과 리듬 배열 및 형식 등을 설정(시스템화)해 두면 내재적 감각으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새롭고 다양한 구성법을 깨우 칠 수 있죠. 저도 그랬지만 이런 과정은 젊은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작곡법과 표현법을 발견하고 익히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기는 해요. 그렇게 새로 시도해본 다양한 작법과 표현법이 유의미한 경험으로 쌓이다 보면 훗날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어법으로 점차 내재화 되어 활용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미 그러한 경험을 10~20년간 쌓고 어느덧 40대에 들어선 작곡가가 여전히 이러한 ‘인위적인’ 작곡법을 고수한다면 내면적 심상을 깊이 있게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곡은 작곡가가 좀 더 젊은 시절 쓴 곡이기는 해요 그러나 최근까지도 동일한 제목으로 비슷한 방식의 연작을 하고 있기에 언급하게 됩니다. 이렇 듯 특정 대상을 통해 설정된 체계로 작곡한 작품들은 대부분 논리구조가 탄탄하고 형식적인 완성도도 대단히 높기에 분석적으로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의 음악에서 마음이 공명하는 특별한 감명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 지점에서 <We are...> 와 <...간(間)>은 작곡가의 방황이 느껴지어 나았지요. 작곡가 자신이 독립된 ‘나’와 사회 속 자아를 재인식함으로 관계에 대해 사색하며 갈팡질팡하는 듯 했거든요. 그러나 의도한지 모르겠으나 베이스 클라리넷 독주의 <We are...> 도 그렇고 6중주 편성의 .<..간(間)>도 다양한 비전통적 악기연주법으로 비음정적 소음을 비롯한 다채로운 소리를 들려주나 내적 울림으로 깊이 있게 들어 갈듯 하다가도 음악 구조의 전통적인 형식과 대조법의 틀에 걸려 그 자연스런 내재적 호흡을 멈추길 반복하고 있어 아쉬움이 커요. 특히 마지막 곡인 ...간(間)이 그런 느낌이 더 강했는데 점층적으로 쌓는 지속화음과 특수 주법으로 효과음을 내는 텍스쳐가 계속 대비적으로 교차해가며 구성되어 더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작곡가가 이야기하는 간(間)과 제가 느낀 간(間) ‘사이’에는 어떠한 이질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연주회를 통해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서 느낌점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비판적으로 서술한 어떤 문제의식들은 동일하게 저 자신을 향한 이야기 이기도 해요. 작곡가들은 자신의 음악작품을 쓰기 위해 이렇게 다양한 고민들을 한답니다.

 

덧글.

연주회 후에 늦은 시간까지 뒤풀이를 하면서 임재경 작곡가님을 비롯해 다른 작곡가들과도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요... 음악과 예술창작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들끼리 오랜만에 진지하게 예술담론을 긴 시간 나눈 것 같습니다. 때론 치열하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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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서울문화재단에 제출된 필자의 글을 조금 문체를 경어체로 고쳐 올린 것 입니다. 최근 몇년간 공연비평이나 칼럼 등을 블로그에는 포스팅하지 않고 잡지 등 다른 문화매체나 소셜미디어(페이스북) 등에만 썼는데, 그 예전 글들을 다시 모아서 정리한 후 차례대로 블로그에 포스팅 해 볼까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익하셨다면 아래 공감도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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