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과 비평/창작과 비평

작곡가 이일주 작품 발표회 리뷰

by Muzik者 2014. 12. 7.

지난 2014년 12월 1일 월요일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IBK 챔버홀에서 있었던 작곡가 이일주의 작품발표회 <흐르는 강물처럼 - 두번째 이야기>에 다녀왔습니다. 연주자 중에 지인도 있고, 협회나 작곡동인등의 연주회가 아닌 작곡가 개인의 발표 연주회가 드물기 때문에 관심있게 다녀왔어요. 홍보지에 소개되는 작곡가의 간단한 이력 및 공연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 --- --- ---


곡가 이일주는 2012년 9월 26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표제의 작품 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이번 공연은 ‘흐르는 강물처럼’ - 두 번째 이야기가 되며, 역시 ‘흐르는 강’에 담겨 있는 ‘삶’과 ‘음악’의 유사성 및 그 상징적 의미에 주목하여 기획되었다.

‘강’ 은 삶의 역정과 닮아 있다. 강은 작고 큰 장애물을 만나 얽히고설켜 맴돌다가 이내 다시 굽이굽이 흘러가는 인생을 환기시킨다. 인간 존재는 강과 같은 삶의 여정 속에서 고난을 만나고, 고난 속에서 또 다시 새로운 삶을 향해 쉼 없이 흘러간다. 강은 ‘생명’이고 에너지이며, 자연스러움이고 시원(始原)이다. 고인 강은 죽음이지만, ‘흐르는 강’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작곡가로서 음악적 행위를 한다는 것, 즉‘곡(曲)’을 쓴다는 것은 ‘흐르는 강물’ 처럼 ‘긴장’과 ‘경계’속에서 변화와 역동의 순간, 생명과도 같은 살아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포착해내는 작업일 것이다.

 

이번 발표회에서 작곡가는 인성(人聲)과 악기의 만남을 통해 흐르는 강물처럼 생명의 기운을 생성해내고 그것을 음악적 작업의 동력으로 삼는 작곡가로서의 존재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이번 작품 발표회에서 작곡가는 한국인이 공감하는 ‘판소리’, ‘가곡’ 등의 양식을 택하였고,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한강 레퀴엠” 에서는 ‘한강’을 소재로 우리의 굴곡진 과거와 현재, 미래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 작곡가 이일주

작곡가 이일주는 한국인의 정서와 삶, 한국의 전통 음악 형식을 현대적 음악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고난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 안에 응결진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전통 민요를 변형시키거나 동서양 소리 매체를 새롭게 융합시키는 방식으로, 혹은 현대화된 종교적 음악 양식으로 재구성해냄으로써 집단기억의 효과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PAN MUSIC FESTIVAL 1997 젊은 작곡가 입선, 2001 World Music Festival Award를 수상하였고, 대구국제현대음악제, 범음악제, 서울모던앙상블, 현대음악전문 연주단체 “TRIO HAAN”, 화음쳄버 오케스트라, 카리엔 현대음악 앙상블, 국립국악원, 대전시립합창단, 인천남성합창단, 인천시립합창단 등의 위촉을 받아 작품이 연주되었으며, 교회음악전문출판사 미완성을 통해 20여 곡의 합창음악이 출판되었다. 현재 작곡동인 누오보 노타(NUOVO NOTA), 작곡가1번지, 창악회, ACL, ISCM, 21세기악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가천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 PROGRAM

“S.O.S.(Save Our Souls)” for Pansori and Cello

세 개의 가곡 for Soprano Solo

“The Day of the Lord” for Bariton Solo, Flute, Violin, Cello and Percussion

“HANGANG REQUIEM” for Mixed Choir and Ensemble


--- --- --- --- --- ---


공연 홍보물이나 연주회 프로그램지를 읽으면서 가장 신선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작곡가 본인에 대한 소개 입니다. 다른 작곡협회나 동인 같은 곳의 음악회를 가보면 작곡가들에 대한 소개가 대체적으로 학력자랑과 경력자랑 및 재직 또는 출강하는 학교 따위를  소개하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관객들에게 그따위 정보가 왜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OO대 음대 졸업, 해외 OOOO대 석사, 해외 OOOO 박사, 현재 OO대 OO대, OO대 출강" 따위만 쓰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일주님의 자기소개는 도도하지 않이면서도 매우 친절하고 음악회 감상에 도움이 되는 정보입니다. 왜냐하면 작곡가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언어와 기존의 작품 성향 등에 대해 밝히며 관객으로 하며금 작곡가의 음악세계를 유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개를 읽게 된 관객은 작곡자의 입장이나 생각을 한번 쯤 곱씹으며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작곡가 협회나 동인 등에서 주최하는 연주회도 이일주님의 이러한 태도를 배웠으면 좋겠군요. 읽고 있나, 각종 협회?!


또한 어떠한 주제를 바탕으로 시리즈 기획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장기간의 집중을 요구하는 고된 업무입니다. 따라서 그 결과물인 작곡 작품과 공연이 성공적이었는가? 라는 성과에 대한 물음과는 별개로 저는 이일주님에 대해 음악 작업에 대한 진지함과 특정 주제 및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하는 태도는 높이 살 만 하다 생각합니다.


그럼 본격적인 공연 리뷰를 해 볼 텐데요... 벌써 공연을 본지 근 일주일이 지나서 쓰는지라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 부분도 있습니만 공연을 보며 들으며 받은 인상을 중심으로 비평해 보려 합니다.



"S.O.S (Save our Souls)" for Sori and Cello

(소리 오영지 / 첼로 유하나루)

첫번째 곡은 (판)소리와 첼로의 S.O.S. 입니다. 프로그램지에 소개된 작곡자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400여 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낸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고자 쓴 작품이다. '진도 상여소리'를 모티브로 하고 소리 이야기극인 판소리 형식을 빌려 '소리와 첼로'의 이중적이고 현대적인 음색으로 재구성시켰다. 작곡가는 이 작품 속에서 첼로를 단순히 소리의 반주 역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독립적인 소리의 역할을 함으로써 전통적인 판소리의 아이디어를 변형시켰다. 시작부분에서 울리는 30초간의 싸이렌 소리는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를 30초간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추모하는 뱃사람들의 관습에서 빌려 왔다. 또한 배에 위험이 닥쳤을 때 울리는 비상소집(단음7회, 장음1회), 총인원 퇴선 신호(장음7회연속)를 리듬적 아이디어로 발전시켰다. 이곡을 헤월호 참사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참담한 심경에 빠져 있는 모든 시민들에게 헌정한다."


이 곡은 설명된 바와 같이 지난 4월16일 진도 앞바다 해상에 있었도 세월호 침몰 참사에 대한 추모곡 입니다. 아직 8명의 희생자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 사고 이면의 진실이 들어나지 않아 여러모로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주제인데 추모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감상해 보았습니다.


다만, 음악적 성향으로 인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공연 즉 퍼포먼스(Performence)의 완성도에 대해 언급할 것이 있는데, 판소리의 비교적 수준 높은 연기에 비해 첼로연주자의 퍼포먼스는 전무하다 싶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공연이었습니다. 첼로 연주자의 시선은 시종일관 악보에 꽂혀 있었으며 특수주법을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악보가 잘 안보인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악보쪽으로 쭉 내밀며 연주하는 등, 전체적으로 악보에 쫓겨 연주한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얼마나 준비가 안되었으면 그렇게 연주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최소한의 암보도 되어있지 않았다는 반증이지요.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판소리의 오영지님은 텍스트에 따라 나름의 표정과 동작 등으로 소리의 맛과 메시지의 전달력을 더하는 반면, 첼로 연주에서는 그러한 점을 무엇 하나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아쉬운 점은 두 연주자간의 복장의 이질감입니다. 창(唱) 하시는 오영지님이 씻김굿의 당골을 연상케 하는 하얀 한복을 입었는데요... 추모곡의 메시지라든가 진도 상여소리 같은 토속적인 요소를 감안하면 의도된 의상인 듯 하며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첼리스트는 평범한 연주단복(검은 와이셔츠와 정장바지)을 입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왜 의상을 통한 메시지 전달내지 추모의 상징을 판소리 창(唱)에게만 전담시키고 첼로에게는 아무런 역할도 주지 않은 것인지 크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양 주자간의 조화가 썩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으로 보였습니다. 사실.. 많은 작곡가 또는 음악연주 단체들이 서양음악과 국악 (그 경계나 의미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두고)간의 접목이나 협업을 할 때 쉽게 저지르는 실수들이 스스로가 각 "장르"라고 하는 "관념"에 갇혀버려 각 장르의 고정관념적 상징을 그대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둘 사이를 접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겠다면서도 국악기 연주자는 한복을, 양악기 연주자는 양복정장을 입고 함께 연주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조화를 깨는 일이 부지기수라는 말이지요. 국악기 연주한다고 현대적인 옷을 못 입을 이유가 없으며, 양악기 연주자라고 정장이나 드레스만 입을 필요는 없지요. 대체적으로 관습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예술의 작가들이 이러한 오류에 빠져버리는 일이 너무 흔해 안타깝습니다.

한편 이 곡에서 첼로의 이런저런 특수주법의 시도는 좋은데 역시 판소리 창과의 조화가 종종 어색합니다. 전통적 선율 주제에 현대적 기법을 도입하려 든 것은 좋은 시도이나 억지로 껴 맞추려 드니 되려 어색하다는 느낌입니다.



"세 개의 가곡" - 산유화(김소월 시), 밤(김동명 시), 귀천(천상병 시)

(소프라노 백재연 / 피아노 김소연)


"'산유화'(김소월), '밤'(김동명), '귀천'(천상병) 세 개의 시를 통해 인간의 생과 사를 표현하고자 한 가곡 모음곡이다. '산유화'는 봄과 같은 유년기를 상징하고 있으며, '밤'은 젊은 시적의 고독과 좌절, '귀천'은 장년기와 노년기를 거치며 생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상징한다. 산유화로부터 귀천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꽃을 피웠다가 지고마는 인생의 생명(生滅)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 시인 3인의 시에서 인생을 상징으로 3개의 시를 묶은 가곡입니다. 전반적으로 한국서양음악사의 예술가곡(한국가곡)들과 맥을 같이하는 서정적인 곡이며 난해하거나 새로운 시도등을 한 실험적 성격의 작품은 아닙니다. 따라서 음악적으로 그리 평가할 만한 시도나 주목할 만한 요소등은 찾기 어렵습니다만, 한국 대표 근대 시인들의 시성에 묻어나는 서정성에 방점을 두어 그 표현에 충실했다는 느낌입니다. 특히 두번째 시인 김동명 시인의 '밤'은 짧은 시에 담긴 시어의 추상적 어두움을 표현하기 위해 곡 전반에 피아노의 저음부에서 특정 음형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이 귀에 들어왔는데... 과거 서양음악에서  b-a-c-h 동기를 사용하던 것과 비슷하네요. 또 세번째 시는 3연으로 나뉘며 각 연은 모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는 같은 텍스트로 시작하는데 악곡도 그러한 형식에 충실했던 것 같네요.

작곡가 이일주님이 만약 이런 형식미가 강한 서정시가 아닌 자유로운 산문시에 곡을 붙인다면 어떠한 형태의 곡을 쓰실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The Day of the Lord" for Baritone Solo, Flute, Violin, Cello Percussion

(서울모던 앙상블 - 플룻 국성화, 바이올린 강운영, 첼로 유하나루, 타악기 심선민, 김성희)

(바리톤 백경석 / 지휘 이일주)


"구양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심판의 날'을 앙상블과 바리톤 솔로의 목소리로 표현한 곡이다. 특히 바리톤 솔로와 앙상블의 소리를 대조적으로 구성하였는데, 바리톤 솔로의 의성어 사용을 통해 인류의 마지막 날을 그렸으며 앙상블의 소리는 영생을 소망하며 구원자를 기다리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공연 1부의 마지막 공연이었는데요 전날의 피로로 인해 이때 쯤 졸음이 쏟아져 감상에 집중하기가 좀 어려웠어요. 게다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이 공연으로 부터 약 1주일정도가 지난 시점이라 처음 듣는 음악을 선명히 기억하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네요. 하지만 당시 받았던 느낌이나 인상만을 간략히 풀자면, 전체적으로 전통적 조성은 아니며 그렇다고 무조(a-tonal)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데 힌데미트(Paul Hindemith)와 비슷한 '자유조성'적 특정이 곳곳에서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흐름가운데 간간히 특수주법을 쓰며 현대적 느낌을 가미하려던 시도가 보입니다만, 그저 곁가지의 꾸밈 같이 쓰일 뿐, 중요한 역할이나 상징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가장 어색하게 느껴진 것은 '퍼포먼스(Performance)의 문제'로 지휘자의 지휘인데요... 같은 '문제점'이 마지막 곡인 다음곡에서도 똑같이 보이기에 다음 곡에서 마저 이야기 하겠습니다.



"HANGANG REQUIEM" for mixed Choir and Ensemble

(서울 모던앙상블 / 서울 모던콰이어 / 피아노 염은화 / 소리(唱) 오영지 / 지휘 이일주)


I. Intro

II. Requiem Aeternam - Kyrie

III. Sanctus

IV. Interlude

V. Pie Jesu

VI. Agnus Dei

VII Liberame

"'한 많은 강', '한민족의 강', '넓고 크게 한없이 흐르는 강'의 다중적 의미를 가진 한강을 위한 진혼곡이다. 총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한강 레퀴엠"은 우리의 굴곡진 역사와 애환으로부터 희망의 미래에 대한 갈구의 과정을 레퀴엠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주로 정선 아리랑, 이별가, 경기 아리랑, 한강수 타령, 닐니리아 등 전통 선율을 차용하여 한강을 둘러싼 우리 역사의 명가 암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 날 공연의 마지막이자 2부 공연 전체를 장식한 곡입니다. 그런데 "한강 진혼곡" 또는 "한강 레퀴엠"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영문으로 제목을 쓴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레퀴엠 미사에서 가져온 텍스트가 영어도 아니고 헬라어인 '기리에(kyrie)'를 제외하면 전부 라틴어인데 굳이 제목으로 영문을 쓴 영문이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네요.ㅋ 그러고보니 앞의 곡도 그러네요 The Day of the Lord, 주님의 날 (또는 문맥상 심판의 날)......


앞의 1부 마지막 곡과 같은 '퍼포먼스의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했는데요... 그것은 지휘자의 독주/독창과 듀오에 대한 지휘 행위입니다. 보통 지휘자의 역할은 다수의 연주가 또는 성악가(합창)의 연주/노래를 하나의 소리로 이끌고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다수의 연주자 및 합창자가 참여하는 앙상블에서 지대한 영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할지라도 독창자 또는 독주자의 연주에 오케스트라가 반주로 쓰인다면 지휘자는 철저히 독창/독주자에게 맞추어 가야합니다. 가곡은 물론이거니와 오페라, 오라토리오의 아리아(Aria)나 에반겔리스트(Evangelist)의 레시타티보(recitativo, 서창)의 연주를 보면 독창자는 자유로이 노래하고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반주를 이들에게 맞추어 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 이일주님의 앙상블 반주의 지휘는 이러한 기본 원칙을 찾기 어려웠으며, 오히려 도입 페시지(Passage)의 독주부터 지휘를 하고, 독주 반주에 대한 소리(唱)/바리톤의 독창 또한 지휘하였습니다. 그 결과 독창자는 자유로운 음악적 표현을 하지 못하고 노래 내내 지휘자의 비팅(Beating, 박젓기)을 보느라 표현에 상당한 제약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합창에 비해 독창자들의 퍼포먼스나 표현은 그리 효과적이지도 인상적이지도 못하고 말았죠. 이것은 지휘자의 명백한 실책이며 이러한 실책은 초보 지휘자나 하는 것으로 경력이 제법 있는 지휘자가 이런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대개 지휘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던 작곡가나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지휘할 때 이런 실책을 흔히 저지르는데요.. 이일주님은 지휘를 부전공으로 석사와 박사를 하였고 지휘경력도 상당한데 왜 이러한 초보적인 실책을 저질렀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또한 첫곡에서 느낀 한복의 이질감을 또 한번 느끼게 되었는데요. 왜 중간 휴식 때 소리(唱)의 오영지씨가 옷을 바꿔입지않고 1부때의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는지 의아합니다. 물론 레퀴엠도 추모의 의미를 갖기에 의복에 그러한 의미를 담아 입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역할을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소리(唱)만 하나요? 그래서 무대에서 보이는 오영지 씨의 모습은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는 앙상블의 인원이 아니라 혼자 동 떨어진 섬 같은 모습입니다. 만약 오영지씨가 협주곡이나 가곡 등의 독창자라면 홀로 드레스를 입는게 관례적으로 허용되듯이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편성이나 위치에서 부터 소리(唱)의 위치는 앙상블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시각적으로 대단히 심미적이지 못하며 이런한 시각적 이질감으로 감상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 의상을 그대로 고집하고 싶었다면 그렇게 동떨어진 곳에 세울 게 아니라 차라리 바리톤과 함께 독창자로 완전히 구분하여 지휘자 옆이나 합창대 앞, 무대 중앙에 세웠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러한 시각적 이질감도 덜 들테죠.


인트로와 마지막 악장인 Libera Me (이거 니 배라메?!, 저를 구원하옵소서)의 후반부에서 물동이의 물을 휘저어 물소리를 내는데 한강의 물소리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상징하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갖다 쓰는 단순함은 별개로 물을 휘젓는 이 것 또한 '연주'인데 타악기 연주자들의 물 휘저음은 퍼포먼스적으로 카리스마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그러한 페시지에 물소리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자신에게 주목을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퍼포먼스라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세계적인 젊은 타악기 연주자 요하네스 피셔(Johannes Fischer)의 연주를 보면 타악기의 연주에서 연기와 같은 포퍼먼스적인 요소들이 연주감상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실감할 수 있는데요... 피셔는 일반적 연주에도 혼신을 다하지만 특히나 솔로 페시지에서는 아무리 단순한 형태의 리듬이나 패시지라도 혼신을 다한 표정과 연기로 관객을 압도해 자신의 연주에게로 관객의 몰입도를 끌어옵니다. 그런데 이날 공연에서 물을 '연주'하던 연주자들은 무표정, 무퍼포먼스(無Performance)로 단순히 물을 저어댔을 뿐이지 '연주'를 한게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유감스럽게도 물소리에 대한 '감상'은 몰입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물 연주를 감상'한게 아니라 단순히 '물소리가 들린 것' 뿐 입니다. 한편, 물소리와 마찮가지로 '인트로'에서 나온 팀파니의 규칙적인 고동박이 'Liebera Me'에서도 그대로 나오는데요.. 형식적으로 회기/재현를 택한것이 물이 돌고 돌아 결국 다시 강으로 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소리(唱)와 합창단이 같은 악곡을 주고 받는 것이나 같이 노래하는 것은 물론 Pie Jesu 처럼 피아노 반주에 맞춘 소리(唱)의 독창(이것을 왜 지휘한 것안지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정말 의아합니다)에서 느낀점은 철저히 서구의 전통적 음악어법이라 토속적 멜로디를 차용했다고 하여 '한국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서양 종교적 합창곡에 소리(唱)가 끼어든 느낌인데요... 특히 Pie Jesu는 차용된 멜로디라도 그 사용법은 서구의 조성적 전통 화성법에 맞추어져 있고 피아노 반주 또한 서양음악의 전통적 반주형태를 그대로 띄고 있습니다. 단지 노래하는 사람의 창법(발성법)만 한국적인 것으로 별로 조화롭게 들리지도 않으며 이질적입니다. 그리고 니 배라메 Libera Me에 쓰인 타령 장단은 텍스트의 간절함과는 달리 매우 경쾌한해서 raMe! raMe!(라메라메-Libera Me ra Me)에서는 그 어감 때문에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어느 부분에서는 팀파니가 대놓고 세마치 장단을 치는데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무엇보다 이 곡에서 근본적으로 드는 의문은 '한강'이라는 상징과 '우리의 굴곡진 역사와 애환'이라는 주제적 요소들을 이 처럼 굳이 종교(기독교)적인 텍스트와 더불어 라틴어로 표현 할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민요나 타령 등 전통적 선율로 부터 차용한 음악을 외국어 텍스트에 붙이는 것이 못할 일은 아닙니다만, 민족적 정서를 큰 주제로 삼은 작품에서 오는 크나큰 이 이질감은 뭐라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마치 교회에서 무당이 십자가를 들고 굿을 하고, 굿판에서 신부님이 작두타고 미사를 올리는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분명한 건 제 취향은 아닙니다. 합창단의 노래가 매우 훌륭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지요...


[총평]

전체적인 총평을 하자면... 전통적인 선율이나 리듬구조에 대한 작곡가 이일주님의 관심과 고민은 충분히 공감하며 이해합니다. 다만 그 결과물에서 나타나는 방법론적 구성들이 과연 효과적으로 나타나는냐는 별개의 문제지요. 방법론적으로 연주기법이나 리듬 또는 선율구조의 변형법은 너무 일차원적이고 그에 대한 성과가 아직 작곡자의 기대 만큼 충분치 않다는 것이 제가 가진 느낌입니다.


참고로 두번째 곡인 '세 개의 가곡'을 제외하면 이번 연주가 모두 초연인데요... 따라서 제 리뷰도 그 곡들에 대한 첫 비평글이 아닐까 싶군요..ㅎㅎㅎ


[여담]

이것으로 이날 공연에 대한 비평을 마치는데요... 이 리뷰를 읽고 계신분들이 주의할 것은,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견해를 담은 것으로 제 생각이 이 공연을 감상하신 다른 분들이나 여러분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가 작곡가의 의도를 잘못 이해할 수도 있으며 감상의 부주의로 착각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작품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평과 비평은 그것이 작곡가의 의도와 맞닿지 않거나 잘못 해설되었다 치더라도 악의적 비난이 아닌 이상 폭넓게 허용되고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넓은 비평의 허용이 어느 분야든 간에 그 분야의 지성적 지평을 넓혀주기 때문입니다.


한국 음악계가 사제지간 및 선후배 관계로 얽혀있는 매우 좁은 집단이다 보니 대체로 과감한 비평이 자유로이 오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저와 같은 듣보잡(돋도 보도 못한 잡스런) 비평가의 리뷰에서 다소 비판적인 발언이 담겼다고 하여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외국의 비평가들은 저보다 더 해요!! 우리 영화계만 보더라도 영화 시사회 후 평론가들이 과감하게 비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줄 평 따위와 함께 별점을 매겨버리기도 하잖아요?! 그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음악계는 너무 비평에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좋은 인사말 밖에 오가지 않으며 설사 자세한 해설과 함께 비평을 하더라도 두루뭉실하게 민감한 발언들은 피하고 말죠. 그런 유명 평론가들의 영혼 없는 비평보단, 듣보잡스런 제 비평이 여러모로 더 유익하다 자부합니다.


물론 오랜시간 고뇌하며 완성한 창작물에 대해 한마디 코멘트로 평가절하해 버리는 일이 때론 너무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창작에 비해 코멘트 따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영혼없는 가식적인 평론보다, 자신의 견해를 뚜렷히 밝히는 것이 책임감 있는 진짜 비평이며 그러한 태도가 비평을 쓰는 사람이 작가에게 갖는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때론 작곡자와 작품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라 해도 말이죠...


이것으로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 무직자 (Muzik者) -